2015.10.14.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주님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왕상 22:1-4)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상 22장입니다. 열왕기상 22장 1-4절 말씀입니다.
1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삼 년 동안 서로 전쟁을 하지 않고 지내었더라.
2 셋째 해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내려가매
3 이스라엘 왕이 자기 신하들에게 이르되, 길르앗에 있는 라못은 우리의 것인데 우리가 시리아 왕의 손에서 그곳을 취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음을 너희가 아느냐? 하고
4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라못길르앗으로 싸우러 가시겠느냐? 하니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으며 내 말(馬)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나이다, 하고
저는 오늘 “주님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주님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열왕기상 22장의 말씀에서 우리는 2명의 왕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사마리아에서 통치하고 있던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 아합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통치하고 있던 남 왕국 유다의 왕, 여호사밧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아합 왕을 중심으로 많은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여기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여호사밧 왕을 중심으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하나님께서 멸하시고자 하였던 시리아 왕 벤하닷을 형제라고 부르면서 놓아주었었는데, 그로부터 3년 뒤에, 라못길르앗이라고 하는 도시를 두고 먼저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차라리 3년 전에 벤하닷을 놓아줄 때, 라못길르앗을 돌려달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을, 3년이 지나고 나서 전쟁을 통해서 그것을 다시 얻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남 왕국 유다의 왕 여호사밧을 찾아와서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동맹군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때 여호사밧 왕은 4절의 말씀과 같이 응답하였습니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으며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나이다.”
이 말은 얼핏 보면 굉장히 겸손하고 사랑이 많고 멋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말은 마치 빛과 어둠이 친교를 나누는 것 같고,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일치를 보는 것 같으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왕이었는데, 지금 바알 숭배자이며,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사악한 자인 아합을 향하여,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으며,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결코 골리앗을 향해서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고, 모세도 결코 파라오를 향해서 이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안타깝지만, 세례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과 같을 수 없고, 사람이 도를 닦고 거룩함을 추구해서 의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이 결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길과 같지 않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길도 육신의 길이 아니며, 이 세상의 길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와 같아야 합니까?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오직 내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통해, 주 예수님과 완전히 일치되어, 똑같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열왕기상 22장의 이야기를 통하여 아합 왕과 함께한 여호사밧에 대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은 열왕기상 22장의 모든 내용을 다 다룰 수 없고, 여호사밧에게 집중해서 말씀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다른 그 누구와 같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소망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친히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오직 주 예수님 자신께로 가까이 이끌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 여호사밧 왕의 믿음
이제 우리 함께 여호사밧이 과연 어떤 왕이었는가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 함께 역대기하 17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역대기하 17장 3-6절까지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 주께서 여호사밧과 함께하셨으니 이는 그가 자기 조상 다윗의 처음 길들로 걸으며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4 오직 주 자기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분의 명령들 안에서 걷고 이스라엘의 행위들을 따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5 그러므로 주께서 왕국을 그의 손에서 굳게 세우시매 온 유다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가져왔으므로 그가 많은 재물과 명예를 소유하였더라.
6 주의 길들 안에서 그의 마음이 고무되매 그가 또한 유다에서 산당들과 작은 숲들을 제거하였더라.
네, 여기서 우리는 여호사밧이 얼마나 주님 앞에서 선하고 훌륭한 왕이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과 아합의 길을 따르지 않았으며, 오직 다윗의 처음 길들로 걸었고, 하나님의 명령들 안에서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역대기하 20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역대기하 20장 17-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7 이 전쟁에서는 너희가 싸울 필요가 없나니 너희는 정열하고 가만히 서서 너희와 함께하는 주의 구원을 보라. 오 유다와 예루살렘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마주보고 나가라. 주가 너희와 함께하리라, 하매
18 여호사밧이 머리를 숙이고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주민들이 주 앞에 엎드려 주께 경배하고
19 고핫 족속의 자손과 고라 족속의 자손에 속한 레위 사람들은 일어서서 큰 소리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니라.
성경에서 너무나 유명한 장면 중의 하나인 찬양의 전쟁은 바로 이 여호사밧 왕과 함께 일어났던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여호사밧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모압과 암몬 자손의 연합군을 맞이하였을 때,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며, 찬양을 통하여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던 믿음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걸었던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 여호사밧 왕의 실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알 숭배자였던 아합 왕을 향하여, 나는 당신과 같다, 라고 말하고, 그를 도왔던 것이 믿음의 길이 아니라는 것 또한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결코 올바른 사랑이 아니었고, 주님의 뜻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함께 역대기하 19장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자기 집에 이르니라.
2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여호사밧 왕을 맞으러 나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돕고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셔야 하겠나이까? 그러므로 주 앞으로부터 진노가 왕에게 임하리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에게서 선한 일들도 발견되었으니 곧 왕이 작은 숲들을 그 땅에서 제거하고 마음을 예비하여 하나님을 구하였나이다, 하였더라.
역대기하 19장 1절은 아합 왕을 돕고 돌아오는 여호사밧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고, 평안히 예루살렘의 자기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2절 말씀에 나타난 것처럼, 선견자 예후를 통해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경건치 아니하며, 주를 미워하는 아합 왕을 돕고 사랑해야 되겠느냐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여호사밧 왕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는 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아합 왕을 섬기고 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라고 하시면서 그를 격려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 인하여 진노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아합 왕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분명히 그는 그것이 주님의 뜻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이며, 옳은 길이며, 선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이었으며, 진노하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여호사밧 왕처럼 어느 때는 믿음으로 잘 걷다가도, 또 어느 때는 잘못 생각하고, 잘못 분별하며, 실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분명히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주님의 사랑이고, 주님께서 주신 부담이고, 또 진리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정반대인 경우가 자주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언제든지 잘못 생각하고,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는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인 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 주님께 물음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상으로 돌아오셔서, 열왕기상 22장 5-7절까지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5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오늘 주의 말씀에 여쭈어 보소서, 하니라.
6 이에 이스라엘 왕이 대언자 사백 명가량을 함께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라못길르앗으로 싸우러 가랴, 아니면 삼가랴? 하니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곳을 왕의 손에 넘겨주시리이다, 하매
7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주께 여쭙고자 하니 이들 말고 여기에 그분의 대언자가 없나이까? 하매
여호사밧은 믿음의 사람답게, 주의 말씀에 여쭈어 보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합 왕은 대언자 사백 명가량을 모으고, 그들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그들 사백 명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주께서 라못길르앗을 왕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라고 대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그들이 참된 하나님의 대언자가 아님을 분명히 간파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 말고, 여기에 정말 하나님의 대언자가 없느냐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쉬운 것은 여호사밧이 전쟁의 승패를 묻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이 아합을 돕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를 물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이렇게 하나님의 대언자를 찾아, 전쟁에 대하여 그분의 뜻을 묻는 사람이었다면, 어째서 자기 자신이 아합 왕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그가 아합을 돕는 것이 선하고, 좋은 일이며, 당연히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은 악한 육신만이 아니라,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육신입니다. 사실 선한 육신이라는 말 자체는 있을 수가 없지만, 때로 우리의 육신은 심지어 선하고 영적인 모습까지도 겉으로 나타내 보이면서, 우리 자신을 속이고, 참된 믿음의 길을 막아서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아말렉의 아각 왕을 살려두었는데, 그것은 주님의 성품인 긍휼과 사랑이 아니라 불순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꾸짖기까지 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막아섰는데, 그것은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아니라, 사탄의 역사로써 하나님의 일을 막아서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주님의 성품이며, 성령님의 열매인 것 같은 사랑과 겸손이, 육신으로부터 우러나올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게 하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순간 주님께 묻고, 응답을 받아 순종하는 길로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또한 혼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조언자가 많으면 안전하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교회 안에서 지체들과 함께 생각하고, 함께 순종하는 교회의 길을 걸어가기 원합니다.
** 육신의 결과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상 22장 29,3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9 이처럼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라못길르앗으로 올라가니라.
30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싸우러 들어가려 하거니와 당신은 당신의 의복을 입으소서, 하고는 이스라엘 왕이 변장하고 싸우러 들어가니라.
결국 미가야라는 참된 주님의 대언자가 나타나서, 라못길르앗으로 올라가면 아합 왕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지만, 아합 왕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는 전쟁에 출전하였습니다. 이상한 것은 여호사밧 왕이 그 모든 것을 보고 들었으면서도, 아합 왕과 함께 전쟁의 원정길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주님의 대언자를 찾아서 물어보자고 하였던 것일까요? 또한 재미있는 것은 아합 왕이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서, 일반 병사처럼 변장을 하였고, 여호사밧 왕은 그대로 왕복을 입고 전쟁을 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제 31-3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1 그러나 시리아 왕이 자기 병거를 다스리는 서른두 명의 대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작은 자나 큰 자와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하니라.
32 병거의 대장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그는 분명히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이켜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크게 소리를 지르니라.
33 병거의 대장들이 그가 이스라엘 왕이 아닌 줄을 알고는 그를 쫓는 일을 그치고 돌이켰더라.
34 어떤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이음매 사이를 쏘니 그러므로 그가 자기 병거를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을 당하였은즉 네 손을 돌이켜 나를 군대에서 데리고 나가라, 하니라
목숨을 유지하려고 육신의 지혜를 가지고 일반 병사로 변장을 하였던 아합 왕은 어떤 사람이 우연히 쏜 활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어떤 사람이라고 기록된 것을 볼 때, 우리는 활을 쏜 사람이 시리아 사람인지, 이스라엘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우연히 쏘았다는 것은 아합 왕을 쓰러뜨리려고 조준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화살이 정확하게 아합 왕의 갑옷 이음매 사이에 명중하게 하셨고, 아합이 쓰러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한편 아합이 살려주었던 시리아 왕 벤하닷은 서른두 명의 대장들에게 오직 이스라엘 왕을 찾아서 그를 쓰러뜨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 왕복을 입고 있던 사람은 오직 여호사밧 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거의 죽을 뻔 하였습니다. 서른 두 명의 군대 대장이 오직 여호사밧과 싸우기 위하여 그를 에워쌌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께 묻지 않고, 육신의 선한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더라면, 예루살렘에서 안전하고 평안하게 거하였을 것인데, 자기 자신의 선한 뜻을 따라 라못길르앗까지 와서 생명의 위험을 자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을 구해주셨습니다. 그가 두려워서 소리를 지를 때, 시리아의 대장들로 하여금 그가 이스라엘 왕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순식간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그가 목숨을 건지고 피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격이 없고, 자주 넘어지며, 실수하는 우리들을 은혜로 대해주십니다. 우리가 오늘도 무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조심하면서, 선하고 의롭게, 잘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시기 때문입니다.
** 주님 같은 사람
여호사밧은 아합 왕에게 나는 당신과 같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주님과 같다, 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주님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상 같은 사람도 아니요, 바리새인 같은 사람도 아니며, 세리 같은 사람도 아니고, 오직 주 예수님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주님처럼 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주님처럼 사랑하며, 성령님의 성품으로 주님처럼 의롭고 거룩한, 십자가의 삶을 통해 주님의 생명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는 주님의 사람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한 가지 귀한 것은 여호사밧 왕이 이 일을 통해 배움을 가졌고, 변화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열왕기상 22장 4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때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들이 당신의 종들과 함께 배들로 가게 하소서, 하였으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서 우리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52,53절에서 그의 아버지 아합과 같이 바알을 섬기고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자였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또한 아하시야는 자기 아버지 아합과 같이 유다 왕 여호사밧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고, 도움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호사밧은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의 요청을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함께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고, 단지 자신의 종들이 여호사밧의 종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나, 그와 어떠한 면에서라도 함께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서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에 사랑으로 보이는 것이, 주님의 눈에는 거역함이 될 수 있고, 육신의 눈에 교만으로 보이는 것이 주님의 눈에는 겸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직 주님의 생명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육신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외침을 들었을 때,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그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에 도전하느냐고 분노하였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목소리를 들은 그의 큰 형 엘리압은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그가 그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 그의 맏형 엘리압이 들었으므로 엘리압의 분노가 다윗을 향해 타오르매 그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광야에 있는 몇 안 되는 그 양들을 네가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무례함을 아나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려고 내려왔도다, 하매
사무엘기상 17장 28절 말씀에서는 이와 같이 엘리압이 다윗에 대하여 분노하였고, 그의 교만함과 무례함을 꾸짖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압의 눈에는 다윗이 건방지게 까불고, 교만하게 말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오직 다윗만이 믿음으로 말하고 있었고, 오직 다윗만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오직 다윗만이 주님의 권능을 직접 경험하고,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은 만한 합당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사람의 관점, 육신의 관점은 주님과 완전히 다릅니다. 성경은 그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 선하고 좋게 보이는 것들이, 주님의 눈에는 악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 교만하고 무례하게 나서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주님의 눈에는 믿음으로 걷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면서,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탄식하기를, 같은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성도들을 돌아볼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일을 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진리를 따르기 원한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저와 우리 모두를 포함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또 실제로 여호사밧 왕이 다윗의 길로 바르게 걸었던 것처럼, 주님과 동행하면서 바르게 걷는 삶의 모습을 실제로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과 다르게, 우리만의 잘못된 관점으로, 잘못된 생각으로, 육신 안에서 우리가 보기에 선한대로, 의로운 대로 판단하고 움직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주님과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님과 같은 관점, 주님과 같은 마음, 주님과 같은 분별을 가지고, 오직 주님의 뜻에 순종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길은 육신 안에서 단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며, 생명과 성령의 길입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더욱 풍성케 되기를 원하고,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모습이 더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실 때, “너는 나와 함께 싸우러 가겠느냐? 너는 나와 함께 십지가를 지겠느냐? 너는 나와 함께 기꺼이 고난의 길을 가겠느냐?”라고 물으실 때, 우리가 여호사밧과 같이 “나는 당신과 같고, 나의 마음, 나의 생각, 나의 뜻, 나의 길이 오직 주님 당신과 같습니다.”라고 대답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