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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2 Corinth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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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2 Corinth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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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로빈

* 설교 일시 : 2011.01.26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

 

인생의 의미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5장입니다. 고린도후서 515-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15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16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무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니 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분을 더 이상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인생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들어가는 말

오늘의 말씀은 제가 처음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을 때 본문으로 삼았던 말씀입니다. 그 동안 잊고 지내다가 요즘 다시 이 구절을 떠올리게 되면서 말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6월이 되면 아빠가 됩니다.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 잘 모르지만, 아빠가 되면 제 개인적인 좌우명이자 제 아이의 좌우명, 그리고 우리 가족의 가훈으로 삼고 싶은 말씀이 바로 고린도후서 515절입니다. 제 아이가 아빠 저는 왜 태어났어요?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해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여지없이 이 말씀을 보여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후서 515절 말씀은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바로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시며, 생명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이유는 바로 죄 때문입니다. 함께 찾지는 않겠지만 로마서 51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또한 로마서 623절에서도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이유는 바로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다함께 고린도후서 521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성경은 죄를 알지 못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죽음을 당할 아무 이유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이 죄가 되시고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낮아지셔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목적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의 대가인 생명을 지불하시면서 죽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모두 지불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셔서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시고 또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후서 515절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또 다른 이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귀한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의 참 의미를 주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사람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면서 자신의 온 일생을 죄악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다시 창조의 목적과 인생의 의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 있는 이유는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위하는 인생을 살 때에, 그것이 당장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 같이 보이지만 결국에는 가장 비참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함께 찾지는 않겠지만 잠언 1625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것의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 때에는 사망의 길들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하여 살 때에는 생명과 화평과 기쁨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 - 살아 있는 자들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후서 515절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만을 위하여 제한되게 죽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과 용서와 구원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제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지는 않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영원한 지옥의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죄와 지옥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의 육신을 십자가에 함께 못 박으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십자가와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와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내가 하려는 시도와 노력을 다 내려놓고 오직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내어드릴 때에 우리의 삶에는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제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스스로 계획하고, 일을 진행하고, 책임지는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의 육신을 십자가에서 함께 못 박으시고 우리 안에 사시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은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위해 살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만이 가장 행복하고 평안하며 감사한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위하여 고생하고 근심하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의 귀한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5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여기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자격은 무엇일까요? , 바로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신학교를 졸업한 자들”, “특별히 믿음이 좋은 자들”, “성경을 많이 아는 자들”, “구원 받은 지 10년 이상 된 자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자들과 같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살아 있는 모든 자들이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숨을 쉬고 계십니까? 같이 한 번 숨을 크게 쉬어 보실까요? , 모두 살아 계시군요. 그렇다면 오늘의 이 말씀을 함께 읽을 때에,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말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승선이가 이제부터는이렇게 되겠죠? 그럼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승선이가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아멘!

 

우리는 다 죄의 삯인 사망을 지불하고 이미 죽었어야 하는 목숨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죽으면 사라져버릴 돈과 명예를 이 땅에 더 쌓기 위한 것일까요? 죽기 전까지 조금 더 좋은 음식을 먹고, 조금 더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한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의미는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그 이하의 모든 인생의 목표는 다 부질없고 허망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언제부터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50살부터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혼한 다음부터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오늘의 귀한 본문 말씀에서는 이제부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지금부터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나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5분 뒤에 일어날 일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직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숨을 쉬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교육할 때 장차 커서 주님을 위하여 살라고 가르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오늘부터, 이제부터 주님을 위하여 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10살까지는 자기를 위해 살고 11살부터는 주님을 위하여 살라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자기를 위해 살고 대학교 때부터 주님을 위해 살라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 오늘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그렇다면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복음을 전하는 것도 주님을 위한 일이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주님을 위한 일이고, 교회 청소를 하는 것도 주님을 위한 일이며, 외국에 선교사로 나가는 것도 주님을 위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 함께 골로새서 3장을 보시겠습니다. 먼저 골로새서 318절을 보시겠습니다.

아내들아, 너희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것이 주 안에서 합당하니라.남편이라는 호칭이 남편이 내 편은 안 들어주고 남편만 든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내들이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은 무엇인가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 이전에 남편에게 순종하는 삶입니다.

또한 19절을 보시겠습니다. “남편들아, 너희 아내를 사랑하며 모질게 대하지 말라.남편들이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은 남의 편만 들지 말고 아내 편도 좀 들어주면서 아내를 사랑하고 부드럽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교회의 연약함을 담당하셨듯이 남편은 아내의 약함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20절을 보시겠습니다. 저와 우리 어린이들이 함께 큰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자녀들아, 모든 일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주를 매우 기쁘게 하느니라.아직 어린 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주님을 위하여 살고, 어떻게 주를 매우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자녀들이 모든 일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게 될 때에 주님께서 매우 기뻐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은 모든 일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삶입니다.

 

21절을 보시겠습니다. “아버지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그들이 낙담할까 염려하노라.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자녀들이 모든 일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고 계시지만, 동시에 부모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권위를 잘 사용해야 함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녀는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각 자녀들을 향한 특별한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향한 우리 자신의 모든 뜻과 계획과 욕심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의 주인은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우리의 자녀들을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실 수 있도록 준비시켜주어야 합니다.

 

훌륭한 부모는 자녀에게 영원한 영광을 얻도록 훈련하는 부모이지, 세상의 돈과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훈련하는 부모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이제부터, 지금부터, 오늘부터,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살도록 가르치며 훈련해야 합니다.

 

이제, 22절부터 24절까지 보시겠습니다.

22 종들아, 육체를 따라 너희의 주인 된 자들에게 모든 일에서 순종하되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자들같이 눈으로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단일한 마음으로 하라.

23 또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너희가 상속 유업의 보상을 에게서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우리가 직장에서 일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것이 세상일이라고 대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눈가림으로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단일한 마음으로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님께 하듯이 그렇게 일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하는 모든 일들이 곧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삶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거창하고 특별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삶은 가정이나 일터에서 나의 위치에 따라 주님께 신실한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섬기는 삶은 교회 중심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교회를 삶의 중심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교회 중심의 삶이라는 것은 모이는 일에 힘쓰는 삶입니다. 혼자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교회로 함께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는 것은 더욱 큰 힘이 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교회 중심의 삶으로 훈련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모임에 임하는 준비된 마음가짐과 자세를 교육하고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가르쳐야 합니다.

학교나 학원에는 절대 지각하지 않으면서 교회의 모임 시간에는 지각한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교회보다 학교가 더 중요한 곳이라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결혼식에는 가장 깔끔하고 멋진 옷을 입고 가면서 주일날 교회에는 아무렇게나 입고 온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교회의 모임보다 결혼식이 더 크고 중요한 행사라고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돈입니까? 아니면 스포츠입니까? 우리의 삶의 중심이 그리스도시라면, 우리는 교회 중심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교회 중심의 삶이라는 것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입니다. 내가 인도한 사람, 나랑 잘 맞는 사람, 나랑 가까운 사람, 나랑 잘 통하는 사람, 나와 함께 섬기는 사람, 나와 같은 소속의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나 중심적인 사랑, 분파적인 사랑, 편을 가르는 사랑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자매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자매들을 만났을 때 반갑게 맞아주고, 인사하고, 관심을 가지고 안부를 묻는 것이 주님을 위한 삶입니다. 형제자매의 즐거움을 함께 즐거워하고, 형제자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삶입니다. 또 때로는 형제자매를 기다려주며 침묵 가운데 기도해 주는 것도 주님을 위한 삶입니다. 나와 평소에 대화를 많이 하지 않은 형제자매라 할지라도 먼저 다가서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며 기도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삶입니다.

 

다함께 마태복음 25장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534-4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4 그때에 이 자기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오라,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아, 너희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가 내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받아들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내게 옷을 입혔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가 나를 찾아 왔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내게 왔느니라, 하니

37 이에 그 의로운 자들이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 어느 때에 우리가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시게 하였나이까?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나이까?

38 어느 때에 우리가 주께서 나그네가 되신 것을 보고 받아들였나이까? 헐벗으신 것을 보고 주께 옷을 입혔나이까?

39 혹은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주께 갔나이까? 하리라.

40 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이들 내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그것을 하였은즉 내게 하였느니라, 하고

성경은 형제자매들을 먹이고 입히고 받아주고 찾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을 위한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창조물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후서 515절 말씀으로 돌아와서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부터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한 삶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1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성경은 누구든지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의 선호도, 나의 스타일, 나의 장단점, 나의 원래 모습,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롭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이 그렇게 살 만한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 근거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새로운 창조물로 완전히 새롭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지만,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조건은 오직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살아 있는 우리 모두가 이제부터 주님을 위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나 자신을 위하여 하던 일들은 무엇입니까? 이제부터 그만두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면 다 내려놓고, 다 버리고, 다 포기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이제부터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없지만,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힘입어 그렇게 살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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