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시리즈

[#21] 은혜를 받는 공식(왕상 21:29)

by 로빈 posted Oct 01,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글쓴이 로빈
2015.09.30.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은혜를 받는 공식(왕상 21:29)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상 21장입니다. 열왕기상 21장 29절 말씀입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손히 행하는 것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손히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의 시대에는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의 시대에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저는 오늘 “은혜를 받는 공식”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은혜를 받는 공식”입니다. 은혜란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친절과 긍휼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은혜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며,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 없이 단 한 순간도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은혜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선하고 의로웠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했기 때문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대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을 살았고, 지금도 숨을 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단지 살아 숨 쉬게 해주시는 은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에 언급된 것처럼,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가 또한 필요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특별한 은혜를 얻을 수가 있을까요?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은혜를 받는 공식”입니다. 공식이란 쉽게 말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우리 학생들이 과학이나 수학을 배울 때, 가장 먼저 개념을 이해하고, 그 뒤에는 공식을 외우게 됩니다. 개념을 잘 이해하고, 공식을 잘 기억한 학생은 시험문제를 잘 풀어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믿음의 공식을 잘 이해하고 마음속 깊이 인식하고 기억하게 되면,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잘 풀어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내리려던 재앙을 돌이키시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합처럼 악한 왕이 없다고 하실 정도로, 아합 왕은 너무나 사악한 왕이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합 왕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아합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겸손히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열왕기상 21장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아합에게 임한 은혜가 어떠한 것인지, 또한 우리가 어떻게 은혜 가운데 걸어갈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걸음마다 늘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 나봇의 포도원
우리 함께 열왕기상 21장 1,2절 말씀부터 살펴보시겠습니다. 
1 이 일들 뒤에 이러한 일이 있었더라. 예스르엘 사람 나봇이 예스르엘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궐에서 매우 가까이 있더라.
2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집에 가까이 있으니 그것을 내게 주어 내가 그것을 채소밭으로 삼게 하라. 내가 그것 대신 그것보다 더 좋은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혹시 네가 보기에 좋거든 내가 그것의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하매
1절 말씀은 “이 일들 뒤에”라고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합이 하나님께서 진멸하고자 하신 시리아 왕 벤하닷을 살려주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듣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사마리아로 돌아온 아합 왕은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 가까이 있는 포도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지 않고, 세상의 소유물에 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육신의 모습이며,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근심하기도 하고, “아 정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라고 느끼며, 새로운 결심을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는 옆에 있는 포도원에, 세상의 소유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집과 새로 나온 제품들과 싸게 나온 물건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합은 그것의 주인이었던 나봇에게 그것을 팔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아합은 왕이었지만 그것을 강압적으로 빼앗으려 하지 않았고, 매우 신사적으로 다른 지역에 있는 더 좋은 포도원을 주거나, 돈으로 값을 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이제 나봇의 응답이 어떠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3,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 나봇이 아합에게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의 상속 재산을 왕에게 주는 것을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하니
4 예스르엘 사람 나봇이 자기에게 한 말 즉 그가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조상들의 상속 재산을 왕에게 주지 아니하리이다, 한 말로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며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빵을 먹으려 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3절에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자 칠천 명 가운데 또 한 사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나봇이었습니다. 성경에서 그의 대사는 딱 한 마디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상속 재산을 팔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의 상속 재산을 팔고, 다른 지파로 넘기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나봇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상속 재산을 팔 수 없다고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 상속권을 팔아넘겼지만, 나봇은 왕이 제안한 좋은 값으로도 주의 상속 재산을 팔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늘의 상속 유업을 이 땅의 유익과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더 좋은 포도원을 주겠다고 제안할지라도, 좋은 가격을 주고, 큰 유익을 주겠다고 제안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하늘의 상속 유업을 팔아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아합은 나봇의 거절을 듣고 돌아와서 침상에 누워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봇의 대답을 듣고 양심에 찔림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이 잘못된 요청을 하였음을 반성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욕심을 이루지 못해 마음이 상했을 뿐이었습니다. 


** 믿음의 결과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상 21장 7-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7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빵을 드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예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에게 드리리이다, 하고는
8 이에 그녀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그의 인으로 봉인하고 나봇의 도시에서 그와 함께 거하던 장로들과 고귀한 자들에게 그 편지를 보내니라.
9 그녀가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힌 뒤에
10 벨리알의 아들 두 사람을 그 앞에 앉히고 그를 대적하여 증언하며 이르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모독하였다, 하게 하고 그 뒤에 그를 끌고 나가 돌로 쳐서 죽이라, 하였더라.
이세벨은 이 세상이 믿음의 자녀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봇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의 믿음에 대해 박수를 쳐주지 않고, 우리의 순종에 대해 격려해주지 않습니다. 

우리 함께 디모데후서 3장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터이나
성경은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난이 없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직 칭찬을 듣고 격려만을 받는다면, 그것은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가 믿음의 어떤 부분에서 불순종을 하고 있거나, 세상의 기준과 타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마찰 없이 잘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나봇과 같이, 우리의 상속 재산을 팔 수 없다고 믿음으로 말한다면, 세상은 반드시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할 것입니다. 

다시 열왕기상 21장으로 돌아와서 10절 말씀을 살펴보시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벨리알의 아들 두 사람이 어떤 말로 나봇을 대적하였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그들이 나봇을 대적하여 증언하면서, 나봇이 하나님을 모독하였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알의 이름으로 나봇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람인 나봇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불리는 사탄이 사용하는 간교한 방식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편인지, 무엇이 믿음의 편인지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대해 믿음을 지켰던 나봇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시편 116장 15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앞에서 귀중하도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초연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하늘의 영원한 상속 재산이 있으며, 또한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고난을 당할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아니할 보상과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찾지는 않겠지만 출애굽기 14장 12절에 보면, 이집트 군대와 홍해 바다 사이에 갇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았으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을 섬기는 것보다 차라리 광야에서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해야 합니다. 나봇은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아합 왕의 요구를 거절할 때, 그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봇은 주의 상속 재산을 팔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용광로에서 죽게 된다 할지라도 느부갓네살의 금 형상에 경배하지 않기를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이 분명하고 굳건하기를 원합니다.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한 믿음을 강건하게 붙들어주시고,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상 21장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나봇이 죽었다는 것을 아합이 듣고 일어나 예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로 취하려고 거기로 내려갔더라.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일어나서 포도원을 소유하였습니다. 찾지는 않겠지만, 열왕기하 9장 26절의 말씀을 보면, 이 날 나봇만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들 역시 다 죽게 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나봇과 함께, 나봇의 상속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포도원을 찾이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침묵하는 것 역시 죄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봇을 죽인 사람은 이세벨이었지만, 아합은 그 일에 침묵으로 동조한 것입니다. 아합은 스스로 명령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자신의 아내 이세벨이 무엇을 행할지 알고도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살인죄에 동참한 것입니다. 우리는 소극적인 태도로 가만히 있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5장 11절 말씀에서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들을 책망하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책망하지 않는다면, 어둠의 일들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 엘리야의 경고
이제 우리 함께 17-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7 주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8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만나라. 보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소유하려고 거기로 내려가 거기에 있나니
19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죽이고 또 소유로 빼앗았느냐? 하고 또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피도 핥으리라, 하라.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반가운 사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이세벨로 인해서 멀리멀리 도망갔던 엘리야입니다. 그가 어느덧 완전히 회복되어 다시 아합 왕 앞에 담대히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나봇의 죽음이 엘리야를 더욱 강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형제들이 당하는 고난은 우리를 낙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더욱 깨어있게 만들고, 또 강하게 일으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담대히 아합 왕을 찾아가서 심판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합 왕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였던 이세벨에 대하여서도, 그의 모든 자녀들에 대해서도 심판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3,2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3 또 이세벨에 관하여도 주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예스르엘 성벽 옆에서 이세벨을 먹으리라.
24 아합에게 속한 자로 도시에서 죽는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는 자는 공중의 날짐승들이 먹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아합은 비록 왕이었지만, 온 가족이 단 한 사람도 무덤에 묻히지 못하고, 모두 개들에게, 날짐승들에게 먹히게 될 것임을 경고 받았습니다. 이것은 온 가족이 어떻게 비참하게 죽게 될 것인가를 경고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25,26절도 보시겠습니다. 
25 그러나 아합과 같이 자신을 팔아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를 부추겼더라.
26 그가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족속이 행한 모든 것에 따라 우상들을 따르는 일에서 매우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이 두 구절에서는 아합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자였는가를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은 우상들을 따르는 일에서 매우 가증하게 행하였으며,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분명한 증거를 보고도 그것을 거절한 자였습니다. 그는 주의 상속 재산을 지키던 나봇을 죽였고,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성경은 아합처럼 악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합은 벌써 죽었어야 마땅했으나, 하나님의 크신 긍휼에 따라 지금까지 살아있었습니다. 


** 아합의 반응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상 21장 27-2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7 아합이 그 말씀들을 들을 때에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몸에 두르며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눕고는 천천히 가니라.
28 주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손히 행하는 것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손히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의 시대에는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의 시대에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엘리야의 맹렬한 경고의 말씀을 들은 아합 왕은 옷을 찢었습니다. 굵은 베를 몸에 둘렀으며 또한 금식하였습니다. 아합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으며,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돌이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심판에 대해서 선포했을 뿐인데, 아합은 마음을 낮추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선포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셨던 것처럼, 아합을 용서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은혜를 받는 공식”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살펴본 아합의 이야기를 다 모아서 우리가 한 번 말씀을 따라 공식을 세워보겠습니다. 
해당 시대에 누구보다도 가장 악한 자라는 평가를 받는 세계 최고 1순위의 사악함 더하기, 우상숭배의 죄 더하기, 믿음의 사람을 살인한 죄 더하기, 갈멜 산의 불과 기근과 비의 모든 표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절한 죄 더하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로 한 시리아 왕 벤하닷을 형제로 여기며 살려준 죄까지 다 더한 뒤에, 거기에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들을 때 겸손히 자신을 낮춘 것을 마지막으로 더하면, 그 답은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계산법을 들을 때, 말도 안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도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요? 아합인데... 아합은 아무리 옷을 찢고 금식을 해도 재앙을 넘겨줄 정도가 아닌데요.”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나도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말도 안 된다고 분노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도 니느웨 사람들과 똑같이 불순종한 죄인이었고, 저 자신도 아합과 똑같이 자격이 없는 자인을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함께 찾지는 않겠지만 골로새서 3장 5절에서는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28절에서는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아합과 다르지 않은 우상 숭배자, 간음한 자, 살인자이며, 하나님 앞에서 사악하고, 자격이 없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 옷을 찢고, 금식하며, 낮아졌지만, 우리는 오히려 낮아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아합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있을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공식을 반대로 만들어보면 이런 식으로 될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잘 읽고 기도했던 시간들, 사람들과 만나서 교제하면서 했던 나의 훌륭한 말들, 교회와 지체들에 대한 나의 관심과 사랑, 남들이 모르는 나의 희생과 섬김, 선하고 의로운 나의 생활들, 이 모든 것을 다 더한 뒤에, 마지막에 나의 자랑과 교만을 더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답을 우리 함께 야고보서 4장 6절 말씀에서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시느니라.
모든 것을 다 잘했다 할지라도 교만하고 높아진 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물리치시는 자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아무리 자격이 없는 자라 할지라도 겸손하다면 은혜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정리
바리새인들은 객관적으로 볼 때, 세리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지킨 것이 사실입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창녀들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의로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물리치신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올라갔을 때, 교만한 바리새인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했던 세리는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혜를 받는 공식, 하나님과 동행하는 공식, 믿음으로 사는 공식은 무엇일까요? 두 글자로 하면, 아합이 했던 것처럼 겸손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정확한 대답이 세 글자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은혜를 받는 공식, 하나님과 동행하는 공식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바리새인의 길을 갈 수밖에 없고, 교만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의 결단과 의지로, 나의 힘으로,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는데, 그 결과는 당연히 나의 자랑이고, 나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겸손하려고 노력해도 그것은 꾸며낸 겸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는 나처럼 섬기지 않고, 나처럼 희생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고, 겉으로는 겸손한 모습만 꾸며내는 힘겨운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내가 없고, 내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모든 것을 수고한 뒤에 “내가 아니요,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나의 자랑이나 영광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요, 감사만 있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할 수 없는 내가 노력해서 달성한 뒤에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강력하게 활동하시고 일하셔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은혜의 삶이 바로 우리의 길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합에게 임한 신기하고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오직 단 한 가지 조건으로 주어졌는데, 그것은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선을 행했느냐가 아니었고, 단지 그가 낮아지고 겸손해 졌느냐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큼 겸손한가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걸음이 율법과 종교와 의무가 지배하는 힘겨운 삶이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하는 살아있고 권능 있는 참된 은혜의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