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세부항목

마음과 행실(렘 17:10)/로빈

2002.10.09.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0세)

제목 : 마음과 행실
본문 : 예레미야 17장 10절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들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의 제목은 “마음과 행실“입니다.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전에 제가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쳤던 적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죄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심판자이신 하나님 등등 여러 가지 하나님의 특성들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두 가지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살피시고 속을 시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각 사람의 행위와 행실의 결과대로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잠시 살펴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씀만큼 강조되어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신구약에 걸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수차례에 걸쳐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대하 19:7) 그런즉 이제 주의 두려움을 너희 위에 두고 조심하여 그 일을 행하라. 주 우리 하나님께는 불법도 없고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는 것도 없으며 뇌물을 받는 것도 없느니라, 하니라.
(삼상 16:7)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

성경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문제를 참으로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5장에서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악한 것들을 열거하시면서, 이러한 악한 것들이 속에서부터 나와 그 사람을 더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4장 23절에서는 삶의 문제들이 마음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열심을 다하여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계명들 중에서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마음을 다하여 사랑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것을 주목하십니다. 우리의 어떠한 선행이나 봉사나 노력을 주의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마음을 열고 주님을 모셔 드렸는가를 관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시려고 뜻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사울보다 능력과 자질이 뛰어나서 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1 그 뒤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 동안 주셨다가
22 그를 폐하시고 그들을 위해 다윗을 일으키사 그들의 왕이 되게 하시며 또 그에 대해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내었는데 그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가 내 모든 뜻을 성취하리라, 하시고 (행 13:21,22)
.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살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속을 시험하시며 자신의 마음에 맞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잠 23:26)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이 내 길들을 지키게 할지니
마음을 살피고 속을 시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우리 각자에게 내 아들아, 너의 마음을 내게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갚으시는 하나님
오늘의 본문, 예레미야 17장 10절로 돌아와서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들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

오늘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시고 속을 시험하실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을 심판하시며 갚으시고 보상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들에게는 심판과 저주로 갚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자가 된 자들에게는 영원한 영광과 통치권으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는 분이심을 마땅히 믿어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죄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상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상하시고 갚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 무엇을 보시며 무엇으로 갚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단지 한번 들여다보시고 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을 시험하시고 우리에게 갚아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고 속을 시험하시되, 갚으실 때에는 그 사람의 드러난 행위와 행실의 결과대로 갚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마음을 보시면 마음에 무엇을 품었는가를 보고 갚아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찌 보면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외양을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으실 때에는 우리의 행위와 행실의 결과대로 갚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후 5:10)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졌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갈 때에는 우리의 행함을 가지고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으로 나아가서 선이든지 악이든지 각자가 자기의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외양을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는 말씀과,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조화롭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성경 세 구절만 보겠습니다. 먼저 베드로전서 1장 17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하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아버지를 너희가 부르며 간구할진대 너희가 여기에 잠시 머물러 있을 동안을 두려움 가운데 지내라.
외모를 중시하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씀과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이라는 말씀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장 23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리니 그리하면 모든 교회가 나는 곧 속 중심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또 내가 너희 행위에 따라 너희 각 사람에게 주리라.
하나님께서는 속과 마음을 살피시는 동시에 각자의 행위에 따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골로새서 3장 25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부당하게 행하는 자는 자기가 행한 부당한 일로 인하여 보응을 받으리니 거기에는 사람들의 외모를 중시함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각자 자신의 행한 것에 따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는 말씀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신다는 말씀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갚으시고 보상하시고 또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에 관하여 기록된 말씀들은 살펴보면 심판은 각자의 행함과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보시는 분이 행위에 따라 갚으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속에 있는 마음을 보시면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 판단하시고 갚으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행실을 하나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게 되어있고, 마음에 가득한 것이 행동으로 나오기 때문에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행실에 따라 갚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시기 원합니다.


** 섬김이 없는 마음은 헛되다.
우리는 보통 “나는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때, 쉽게 아멘 할 수 있습니다. “맞아, 나는 마음은 있어.”라고 생각하며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그렇다면 나는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 또는 “지금 섬기고 있지는 않지만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실제적인 준비들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면 대답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모순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 내가 실제로 주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지만 주님은 내 마음을 아셔.”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아갈 때는 자신의 실제적인 행함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섬기기 원하는 마음을 한번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나 생각으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마음으로는 주님을 섬기기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만으로는 마음만으로는 주님 앞에 보상받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 가만히 앉아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그 사랑이 표출될 것입니다. 누군가 주님을 섬기기 원한다면 벌써 어느 곳에서 섬기고 있을 것입니다. 또는 그 준비를 꾸준히 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원하는 마음은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러나 실제적인 섬김이 없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공허한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내 양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구나.”하신 것이 아닙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주님을 섬기겠다는 그의 마음은 매를 맞고 돌에 맞고 파선을 당하고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을 비롯한 수많은 어려움들을 뚫고 그로 하여금 주님의 길을 가게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 중에 가만히 앉아서 마음만으로 주님을 섬기고 따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 중에 누군가가 “나는 실제적인 섬김은 없지만 주님은 내 마음을 아시고 나는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마귀에게 속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실제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공허한 말들을 제거하기 원합니다. 섬김의 실제가 없으면서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공허한 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실패도 안하고 넘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죄가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은 간음도 했고 살인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이키고 회복하여서 주님을 계속해서 따랐습니다.
오늘날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죄가 하나도 없고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여서 주님을 필요로 하며 사람,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든, 또는 뭐라고 하지 않든 간에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넘어지고 실패할지라도 계속해서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우리 안에 마음은 있다고 하지만 실제적인 섬김들이 없다면 이 시간에 그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돌아보기 원합니다.


** 두 가지 속이는 것
마음과 행실, 주께서는 이 두 가지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고 말씀하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려 실제로 우리의 몸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실제적인 섬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나는 마음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속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마음은 없으면서도 몇 가지 일들을 형식적으로 해내고 있다고 해서 나는 주님을 잘 따르고 있다고 속는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참으로 치우치기를 잘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도 원하시고 몸도 원하십니다. 마음만의 드림도 부족하고 몸만의 드림도 부족합니다. 마음이 가득하다하면서 실제적인 섬김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도 모순이며, 몸을 드려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으나 마음이 다른데 가있다면 그것도 헛될 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실제적인 섬김이 없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어떠한 섬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은 섬김이라고 모두 다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어떠한 섬김은 미워하시며 역겨워 하십니다. 이사야 1장에서는 주님의 그러한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많은 희생제물로 주님께 드렸지만 주님은 “너희가 내게 바치는 수많은 희생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사 1:11)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예물들을 주님 앞에 가져왔지만 주께서는 “다시는 헛된 봉헌물을 가져오지 말라.”(사 1:13)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계속해서 “분향하는 것은 내게 가증한 것이요, 월삭과 안식일과 집회로 모이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니 곧 엄숙한 모임 그 자체가 불법이니라.”(사 1:13)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다른데 가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다른데 가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형식적으로 가져오는 예물들과 희생제물들과 엄숙한 집회들까지도 가증하게 여기시며 견딜 수 없어하시고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이 세상의 우상들과는 다릅니다. 이 세상의 우상들은 사람의 수공물이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죽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형식적으로 이러저러한 것들을 가져다 드리면 만족해하는 분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으로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는 죄악은 무엇입니까? 그 중 한 가지는 위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는 말을 들으셨을 만큼 그들을 사랑하시고 참된 길로 이끌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분을 참지 못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너희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라고 말씀하시면서 까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들이 실족할 만큼이나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위선은 하나님을 속이려드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7 너희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대해 잘 대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자기 입으로는 내게 가까이 오며 자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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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술에 속는 분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아부하듯이 “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듣고 기뻐하시는 줄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입술로 그렇게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줄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입술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까? 정작 마음속에는 세상과 재물과 스포츠와 나의 유익만 가득 차 있으면서 입술로는 주님을 위한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보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기도회로 모였고 몸은 모두 이 자리에 앉아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보물은 우리 주님 자신이길 원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송가의 고백이 우리 입술로 만의 고백이 아니라 정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 오늘날 우리의 문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능력과 지식이 부족한 것입니까? 집회 시에 눈물이 없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주님의 일들에 실제적인 드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기 원한다는 고백을 하였다면 그것을 열매로 입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자신이 굳이 입증하려 하지 않아도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지 않고 우리를 죄악과 저주 속에 그대로 내버려두시면서 높고 높으신 보좌 위에 앉아 “나는 너희를 사랑하노라.“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아,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는구나.“하는 마음이 들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제적으로 주님 앞에 섬기는 것이 없으면서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한다면 그것만큼 주님을 조롱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실제적인 드림이 없다는 것은 마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정말 마음은 있는데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마음은 있는데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지금처럼 비행기도, 자동차도 없는 시대에 복음을 전파하러 세상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편했기 때문에 주님을 잘 섬겼던 것이 결단코 아닌 것입니다. 영적인 서적들도 부족하고 어찌 보면 교리적인 지식들도 우리보다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부흥의 역사들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기 원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원하는 참된 마음을 가지기 원합니다.

만약 육상선수가 되고 싶은 소년이 있다면 계속해서 달리기 연습을 할 것입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권유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소년이라면 누가 말려도 계속해서 연습할 것입니다. 자신을 더욱더 철저한 훈련 가운데 두며 피나는 연습을 꾸준히 지속할 것입니다. 그 소년이 선천적으로 달리기를 잘하지 못하더라도 계속해서 하려는 그의 마음과 열망이 언젠가는 그를 육상선수로 만들어 놓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과 열망은 그를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하여금 계속해서 달리도록 만들 것이며 계속해서 자신을 훈련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목사님이 또는 앞선 형제님들이, 달려라 달려라해서 달려갈 수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형제, 섬겨야지.”, “자매, 이 일 좀 해봐.”라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주님을 향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우리가 섬길 일들을 찾아 나서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선천적으로 어떠한 일들을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 열망이 나를 가만있지 못하게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먹고 싶은 음식이 앞에 차려져 있는데 먹지는 않으면서 “나는 먹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제의받은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서 “나는 그 일을 하기 원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 사람이 정말 마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는 기회가 없어서도 아니요,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대학을 나온 인재들도 취직을 잘 하지 못할 만큼 취직하기가 어려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언제나 누구든지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조건은 한 가지, 그가 주님을 섬기기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디모데전서 1장 12절을 보시겠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 그분께서 나를 신실한 자로 여기사 내게 사역을 맡기셨기 때문이라.
바울은 지금 디모데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께 감사하는데 그 이유는 그분께서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직분을 맡은 것을 부담스럽거나 거북하게 여기지 않고 감사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때 사도바울은 정말 주님을 섬기기 원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직분을 맡기시기 전에 한 가지 보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신실함입니다. 신실함은 무엇입니까? 부지런하고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자세와 태도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비유에서 ”선하고 신실한 종아“,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말씀을 볼 때 신실함과 게으름이 반대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어떠한 것을 꾸준히 지속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을 신실하게 여기셔서 직분을 맡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직분을 줄테니까 앞으로 신실해야 해.“라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직분을 주시기 전부터 그가 신실한가를 보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바울은 어떠한 직분, 어떠한 일이 주어지기 전부터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고 부지런하게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도바울이 주님의 일에 신실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마음 안의 열망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품은 사람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꾸준히 부지런하게 달려갈 것입니다.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하지만 꾸준히 부지런하게 달려갈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도 그러했기에 주님께서 그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직분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주님을 더욱 섬기기 원하였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뭐라고 부르는지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능력을 누가 주셨습니까? 바울 안에 원래 능력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에게 직분을 맡기셨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직분과 함께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었던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과 열망이 사도바울로 하여금 주님의 일에 열심을 해고 부지런하고 신실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직분을 맡기시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주님의 일을 맡아서 섬기는 것은 나의 능력과 관계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능력 있는 인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주님의 일을 결코 만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오직 그 안에 생명을 가진 자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능력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능력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마음입니다. 오직 나의 마음입니다. 능력의 부족, 지식의 부족 그 어떠한 것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어떠한 것들을 공부하고 갖추고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양적인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양을 보시지 않고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신장과 용모와 재능과 특기를 주의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 마무리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들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
제가 처음 설교를 준비하려고 생각했을 때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받는 것은 각 사람의 행위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주님 앞에서의 섬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주로 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더 되새기고 준비하면서 마음 없이 몸을 드려 섬기는 것 또한 헛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분명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선이든지 악이든지 각자가 자기가 행한 것들을 가지고 심판하실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한 행함은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위선적으로 억지로 주님을 섬기고 나서, 섬겼다고 말하는 그러한 섬김에는 보상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앞에서도 언급했던 이사야 1장 말씀과 같이 그것들을 미워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행위에 따라 갚으시되 그 행위의 동기와 의도 또한 살피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마음과 행위가 따로 갈 수 없습니다. 마음만의 드림, 마음만의 헌신은 의미가 없습니다. 또 마음 없는 섬김, 마음 없는 봉사 또한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입니다. 마음을 드렸다면 몸도 같이 드려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 자신의 마음에 맞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 땅에는 이미 종교적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 의무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 율법적으로 믿음생활 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것들에 신물이 나셨고 역겨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고 속을 시험하시며 참으로 주님의 마음을 흡족케 해드릴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말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 실제적인 몸을 드려 섬기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을 찾으십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회로 모였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 온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마음 없는 기도, 형식적인 기도를 하지 않기 원합니다. 많은 말들로 유창하게 기도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를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예레미야서 공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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