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세부항목

위치 안의 순종(창 16:1-10)/로빈

2002.08.07.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0세)

제목 : 위치 안의 순종
본문 : 창세기 16장 1절-10절
1 그런데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그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더라. 그녀에게 한 여종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집트 사람이요, 그녀의 이름은 하갈이더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이제 보소서, 주께서 나를 막으사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하녀에게 들어가소서. 내가 혹시 그녀로 말미암아 아이들을 얻을까 하나이다,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 하녀 이집트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자기 남편 아브람에게 주어 그의 아내가 되게 한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 지 십 년이 지난 뒤였더라.
4 ¶ 그가 하갈에게 들어가니 그녀가 수태하니라. 그녀가 자기가 수태한 것을 알고 자기 눈으로 자기 여주인을 멸시하므로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하는 부당한 일을 당신이 당하기 원하나이다. 내가 내 하녀를 주어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녀가 자기가 수태한 것을 알고 자기 눈으로 나를 멸시하니 나와 당신 사이에서 주께서 판단하시리이다, 하니라.
6 그러나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의 하녀는 당신의 손 안에 있으니 당신이 기뻐하는 대로 그녀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그녀를 학대하니 하갈이 그녀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니라.
7 ¶ 주의 천사가 광야의 물 샘 옆에서 곧 수르로 가는 길에 있는 샘 옆에서 그녀를 찾아내어
8 이르되, 사래의 하녀 하갈아, 네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니 그녀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나이다, 하매
9 주의 천사가 그녀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 하고
10 주의 천사가 또 그녀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여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니라.


내일은 수련회 날입니다. 어떤 설교를 해야 할지 오래 전부터 생각했었는데 세 번이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음속으로 준비한 본문과 주제로 설교하려다가 수련회 전날인 만큼 수련회를 준비하는 설교를 해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 준비하는 것은 좀 무리인 듯싶어 원래 하려고 했던 대로 제가 이미 한번 받았고 누렸던 말씀으로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위치 안의 순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이 설교가 우리들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데 부축이 되고 힘이 되는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 본문 설명
본문에서 하갈은 이집트인 여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람이 자신이 살던 땅에 기근이 들었을 때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브람은 자신의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거짓말하였습니다. 파라오는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아내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파라오의 집에 큰 역병들로 재앙을 내리심으로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밝혀내십니다. 그때 파라오는 아브람에게 화를 내며 아브람을 내어 쫓습니다. 하갈은 아마 이때 아브람과 함께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하갈은 아마 사래를 파라오의 집에 데려올 때부터 사래를 시중들기 시작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갈이 이집트에 있는 많은 여종들 중에서도 파라오의 집에서 일하였던 것을 보면 굉장히 잘나가던 여종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 어쨌든 하갈은 아브람이 이집트에서 나오면서 사래의 종으로 같이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얼마나 자식을 갖고 싶어 했던지 아브람에게 가서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내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듣고 하갈을 아내로 삼습니다. 그리고 사래가 예상했던 것처럼 하갈은 임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사래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하갈이 그녀의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래는 화가 나서 아브람에게 불평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당신의 하녀는 당신의 손 안에 있으니 당신이 기뻐하는 대로 그녀에게 행하라”라고 대답합니다. 사래는 그 말을 듣고 하갈에게 심하게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여종들에게는 시키지 않는 굳은 일을 시키고 힘든 일을 많이 심하게 시켰을 것입니다. 하갈은 견디다 못해 도망을 나오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하갈은 매우매우 억울합니다. 아니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여종으로 잘 지내고 있는데 갑자기 사래라는 여자가 나타나더니, 자신의 주인 파라오는 그녀를 아내로 삼으려고 하고 자신은 그녀의 여종이 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사래라는 여자가, 함께 온 아브람이라는 남자의 아내라는 것이 밝혀지더니 자신은 사래의 여종이 되어 이집트에서 함께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갈은 사래의 여종으로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아주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이상한 여자의 여종이 되어야 하는가? 난 이집트에 남았어야 했어. 계속해서 같이 지내다보니 사래는 임신도 못하는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갈은 마음속으로 사래를 계속해서 멸시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사래가 하갈을 자신의 남편 아브람의 아내로 준 것입니다. 그리고 하갈은 임신하였고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자 드러내놓고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래는 아브람에게 불평하고 아브람은 사래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래는 이제 그동안 받아온 모욕과 멸시의 대한 진노를 하갈에게 퍼붓습니다. 그러자 하갈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게 됩니다.
하갈은 도망가면서 흐느껴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집트에서 나올 때부터 뒤엉킨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한탄 또는 사래에 대한 억울한 마음 등이 뒤엉켜 비참하게 울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주의 천사가 그녀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하갈을 부릅니다. 어떻게 부르는지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래의 하녀 하갈아
주님은 그녀를 부를 때 “오 불쌍한 하갈아”, “오 사랑하는 하갈아”, “복 받은 여인 하갈아”라고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녀를 부르실 때 “사래의 하녀 하갈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장 우선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많고 많은 수식어 중에 “사래의 하녀”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갈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러자 하갈은 대답합니다. “나는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나이다.”

성경의 기록에서는 이렇게 한마디로 대답하지만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주님 앞에서 울부짖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 주님 제 처지를 좀 보십시오!!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임신도 못하는 제 여주인 사래가 자기를 대신해서 자식을 낳아달라고 하길래 그렇게 하였더니 이제는 저를 시기해서 저를 박대하지 뭡니까!? 그래서 저는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하나이다.”
이때 주의 천사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오 상처받은 영혼 하갈아, 위로를 받으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가서 너의 나쁜 여주인 사래에게 경고하리라.” 이렇게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단호한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 먼저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주님은 하갈에게 주실 축복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먼저는 순종이요, 그 다음이 축복인 것입니다. 먼저는 순종이요, 그 다음이 위로인 것입니다.


** 우리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 순종
성경은 순종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참으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전에 우리교회를 방문하였던 조 윌리암 형제님도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순종”이라고 말할 만큼 성경은 순종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최종권위이며 우리는 이 권위아래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분은 통치자들 중의 통치자이시요 권위자들 중의 권위자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다양한 경륜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요구하시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사람 아담에게서부터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노아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다윗... 수많은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이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들어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 (롬 5:19)

하나님께서 순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문제조차 하나님은 순종, 불순종의 여부를 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실 때에 그리하시리라. (살후 1:8)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지옥에서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많은 죄들을 지어서도 아니요, 많은 선한 일을 하지 않아서도 아니요, 다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였기 때문에 지옥에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많은 선한 일들을 많이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함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이라는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기에 순종, 불순종의 문제로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시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선하고 좋아 보이고 영적으로 보이는 일도 순종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은 제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의 종류와 각 제사를 드리는 방법들, 그에 따른 제물의 종류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은 어떠해야 하는 지와 같은 것들을 아주 길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순종을 제사보다 기뻐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2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주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만큼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크게 기뻐하시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 숭배와 같나이다. 왕이 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더라.”(삼상 15:22,23)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것이다.
이렇듯 성경은 신구약에 걸쳐서 순종에 대해서 참으로 강조하며 또 많은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이 “위치 안에서 하는 순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주관하시며 이 세상의 모든 질서체계,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주관자들과 권세자들의 위치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또한 우리 모두의 위치를 친히 안배하셨습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의 위치와 자녀의 위치, 부부사이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위치, 교회 안에서는 감독과 성도들의 위치, 또 세상에서는 왕들과 권세자들, 그리고 백성들의 위치를 모두 안배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순종은 능력별로 하는 순종이 아닙니다. 내 위에 있는 사람이 능력이 있는가를 살피고 순종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내 위에 있는 사람인가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위치 안의 순종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저 형제님은 뭐가 어때”, “우리 부모님는 뭐가 어때”, “내 남편은 뭐가 어때”하며 판단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는 그 권위자가 나에게 와서 무엇인가를 요구하면 우리는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정한 위치는 그 사람보다 낮지만 마음 속에서는 이미 그 사람보다 높아져서 그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의 본문에서 살펴본 하갈과도 같습니다. 사래를 멸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하갈에게는 사래에게 순종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주님 앞에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발견되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위치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위에 있는 권위도, 또 내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주님께서 안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는 잘 순종하겠는데,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어렵다. 하나님은 사랑할 수 있겠는데 보이는 형제들은 어렵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니 자기가 본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자기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요? (요일 4:20)
이것은 순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노라.” 하면서 자기 권위자에게 거역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권위자에게 거역하면서 어떻게 본적이 없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 예수님의 순종의 본
우리는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자가 완벽한가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나보다 뛰어난 사람인가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을 나에게 권위자로 안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위치 안에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나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순종의 본을 남겨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 절기가 끝나서 돌아올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르셨으나 요셉과 마리아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동행자들 중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들은 하룻길을 간 뒤 예수님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삼일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는데, 예수님은 박사들 가운데 앉아 계셨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다가가 어린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노라.”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반드시 내 아버지 일을 해야 함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취하신 행동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셨습니까? “아! 아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 여인이여 당신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들은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십니까?”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내려가심으로 그들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순종의 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과는 비교도 안되는 지혜와 명철과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는 위치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능력과 지혜로 치자면 그들은 예수님과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무지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떠했겠습니까? 그 자리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어떠한 순종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는지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권위자가 지식이 있는가 능력이 있는가를 실수가 없는 사람인가를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와 우리를 그 위치로 안배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하갈에게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래의 하녀 하갈아”,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


** 교만이 우리의 순종을 방해한다.
오늘날 우리가 순종하는 것에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들로 답할 수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하갈도 그러했고, 우리의 경우도 자주 그러하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교만한 마음 때문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순종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요, 지혜가 부족해서도 아니요, 의지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많은 경우,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가 교만한 마음으로 권위자를 멸시하기 때문에 마음이 꺾이지 않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제적인 위치는 낮지만 우리의 마음은 높아졌기에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갈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그녀의 여주인을 멸시하였습니다. 자신은 임신하였고 자신의 여주인은 임신도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높아진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하갈은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겸손과 순종은 떼어놓을 수 없고, 교만과 거역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자가 불순종할 수 없으며, 오만한 자가 거역하지 않을리 만무한 것입니다.
누가 구원받지 못합니까?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모두 구원받을 수 있으나 교만한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않는 사람은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겸손과 순종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겸손이 가면 순종이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순종의 문제로 주님 앞에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높아지지 않았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6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시느니라. 7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 (약 4:6,7)
겸손과 복종이라는 단어가 함께 이어져 있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젊은 사람들아, 이와 같이 장로에게 복종하고 참으로 너희가 다 서로에게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5)

오늘날 누군가가 자신의 권위자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일에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높아져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 권위자를 나와 비교하고 판단하는 악한 습관을 버리기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온전히 낮아질 때 우리는 순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먼저이다
저는 오늘 순종에 대해 말하면서 한 가지 순서를 올바르게 하고 넘어가기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안배하신 우리의 권위자들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그보다 앞서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권위자들에게 순종하는 이유는 주께서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천사가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녀의 손 밑에서 복종하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너의 권위자에게 복종하라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 진리를 반대하는 권위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부모님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고 나의 남편이 진리를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의 권위자인 남편이, “당신은 이제 하나님을 떠나시오.”한다고 해서 순종해야 하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저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신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다 같이 사도행전 5장 27-29절을 보시겠습니다.
27 그들이 사도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그들에게 물어
28 이르되, 너희가 이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우리가 너희에게 엄히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보라, 너희가 너희 교리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으며 또한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하는도다, 하니라.
29 ¶ 이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응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대제사장은 유대인들 사회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일반 제사장들도 권위가 있는데, 대제사장이라면 더욱 높은 권세자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엄하게 명령한 것을 베드로와 사도들은 대놓고 거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하였는데 베드로와 사도들은 거리에서,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전파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는 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만약 누군가가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려 할 때 우리는 그가 누구일지라도 대항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절대 한발자국도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한발자국이라도 물러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수많은 순교자들은 여기에 기록된 베드로와 사도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왕이라 할지라도 그가 교황이라 할지라도 그가 어떠한 권세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한 순교자가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성경에서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는가? 너는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찌하여 나를 거역하는가?” 왕은 그 순교자의 믿음을 포기시키려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순교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나의 믿음을 부인할 수 없고, 왕께 순종하기 위하여 순교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순종이요 그 다음은 다른 권위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 결론
오늘 이러한 말씀이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걷는데 있어서 순종이라는 부분을 각인시켜 주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능력 많고 지식이 뛰어난 엘리트 같은 그리스도인보다 무식한 종같이 시키는 대로 말씀대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을 찾으십니다. 오늘날 라오디게아 교회시대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신들의 의견과 권리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권위의 말씀이 떨어질 때 입을 다물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무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사도들은 수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절대적으로 순종하였기에 주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주님 앞에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순종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인이신 우리 주님께 순종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위자들로 세우신 자들에게 복종하기 원합니다. 그들을 거역함은 우리를 그 위치 안에 두신 하나님을 거역함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높아진 마음들이 낮추어지기 원하고, 나의 권위자를 비교 판단하는 모든 악한 죄악들이 철저히 버려지기 원하고, 오직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로 함께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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