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세부항목

성령으로 사랑케 하소서(갈 5:16-26)

2007.09.26.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5세)

제목 : 성령으로 사랑케 하소서(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서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성령으로 사랑케 하소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들어가는 말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 가운데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가장 먼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굶주려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담도록 만들어진 질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은 죄가 아니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데도 자꾸만 이 세상과 사람들 가운데서 만족을 찾기 때문에 여전히 굶주려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고 그 열매로 다른 이들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으려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전히 만족하고 가득 채워져야 함을 또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저는 말씀의 제목을 "성령으로 사랑케 하소서"라고 정해보았습니다.
세상에서도 사랑을 외치고, 다른 모든 이방 종교들도 사랑을 외치고, 교회에서도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사랑이라고 다 같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은 단지 간절하고 뜨겁고 담대한 사랑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써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사랑의 열매는 다만 겉에서 보기에 뜨겁고 간절한 사랑이 아닌 깊은 속에서부터 성령을 통하여 나온 사랑입니다.



** 성령을 통한 사랑의 특징
오늘의 본문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볼 수 있는 성령의 사랑의 특징은 욕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으로부터 나온 사랑의 특징은 욕심이 섞여있습니다. 성령의 사랑은 아무런 계산이나 조건이 없지만, 육신의 사랑에는 요구가 있고 원하는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이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면서 뭔가를 계산하고 요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육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한 육신의 사랑은 결코 사랑을 하는 우리나 사랑을 받는 대상을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육신으로부터 나온 사랑은 결국 우리도 힘들게 하고 상대방도 힘들게 합니다. 육신의 사랑은 우리도 상처 입히고 상대방도 상처 입힙니다. 육신의 사랑 안에는 욕심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 욕심이 얼마나 영적으로 선하게 포장되어 있느냐와 상관없이 욕심이 들어간 사랑은 성령의 사랑이 아닙니다. 육신의 사랑은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 질투와 증오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랑이 성령 안에서 나온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육신의 사랑은 이기적이며 성령의 사랑은 희생적입니다. 육신의 사랑은 상대를 지치게 만들지만 성령의 사랑은 상대를 안식하게 합니다. 육신의 사랑은 감정적이며 한시적이지만 성령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은 성령 안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는 길은 있는 힘을 다해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길이 아니라, 할 수 없는 나를 십자가에 넘겨드리고 성령 안에서 걷는 삶으로 말미암아 사랑을 흘려내는 길입니다.

이제 18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볼 수 있는 성령의 사랑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사랑이며 율법으로 억지로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여기서 율법은 무엇입니까? "사랑을 해야한다"는 너무나 옳고 합당한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법을 알고 있지만 잘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이 법을 지키고자 할 때 우리는 육신을 따라 걷게 됩니다. 로마서에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 아래서 사랑할 수 있는 육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해야한다"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나오는 사랑은 자연스러우며 평강이 흐르지만 율법 아래에서 나오는 사랑은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가운데 나오는 사랑은 힘이 들지 않지만 율법 아래에서 나오는 사랑은 사랑을 하는 우리를 더욱 메마르게 하고 피폐하게 만듭니다. 성령의 사랑은 높은 표준의 사랑을 이루고서도 여전히 겸손하지만 율법을 달성하여 사랑을 이룬 사람은 교만하게 됩니다. 성령의 사랑을 따르는 사람은 실패해도 은혜 가운데 감사하지만 율법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실패할 때 크게 낙담합니다. 성령의 사랑은 상대의 반응과 상관없이 여전히 사랑하지만 율법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반응에 따라 상처를 받고 미워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길은 "사랑을 해야한다"는 법을 지키는데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가는 길은 눈 딱 감고 못마땅한 사람을 한번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길이 아니라 날마다 꾸준히 성령의 인도를 받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길입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 나타난 많은 사랑의 말씀들 가운데 3가지 부분을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고, 두 번째는 주 예수님의 사랑이고, 세 번째는 사도 바울의 사랑입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먼저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여러분 혹시 성경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제일 처음으로 나온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바로 창세기 22장입니다. 한번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22장 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유일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산들 가운데 하나에서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백 세가 되어서 얻은 유일한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알고 계셨는데도 그를 번제 헌물로 드리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시고 잔인하시다고 말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이러한 순종과 헌신, 이러한 내려놓음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 이삭을 사랑했지만 여기서 그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했다는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입증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의 마음은 잘 생각해보지 않고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주로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 헌물로 바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데 우리가 만약 이 사건을 신약에서 가장 처음으로 등장한 "사랑"과 연결하여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한번 신약에서 가장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입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입니다.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나타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한 아버지가 사랑하는 유일한 아들을 번제 헌물로 드리는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다면,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해 헌물로 드리는 실체를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삭을 바칠 때 아팠던 그 만큼 하나님의 마음도 아팠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삭을 향한 사랑의 마음만큼 하나님께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삭이 말합니다. "번제 헌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 헌물의 어린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시리라."
그리고 신약을 여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하다고 말하면서 아브라함을 동정한 만큼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아들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이요 원수였던 우리들을 위해 아들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크고 작은 조건들과 요구들로 나에게 짐을 지울 때에 그보다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조건도 제시하지 않으시고 다만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아무런 조건 없이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나타날 것입니다. 나의 결심과 부단한 노력으로 만들어 내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에게 흘러서 넘치는 그 사랑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우리는 사모합니다.



** 주 예수님의 사랑
이제 두 번째로 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다함께 빌립보서 2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안위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인정이나 긍휼이 있거든"
빌립보서 2장 말씀은 "그러므로"라고 시작하는데 이것은 1장의 문맥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빌립보서 1장 뒷부분의 문맥은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사랑과 겸손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고자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이나 성령의 열매들을 추구하거든"

2절과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 너희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마음으로 일치하여 내 기쁨을 성취하라.
3 어떤 일도 다툼이나 헛된 영광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며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겸손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가족들과 또한 교회의 지체들과 마음을 같이하여 한마음으로 일치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이고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을 때 다툼이 일어나고 교만이 있을 때 헛된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사랑이 있을 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되며 겸손이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못마땅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지 않고 우리에게 사랑과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상대방을 고쳐주시라고 기도하면서 그에게 요구하고 짐을 지워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없고 겸손이 없는 우리들을 먼저 변화시키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변화되어 사랑하고 겸손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사용하셔서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의 문맥은 사랑과 겸손으로 복음의 삶을 사신 우리 주 예수님을 모범으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5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
6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7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들을 사랑하신 주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영광과 높은 지위를 다 버리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은 그분을 냄새나는 말구유에 태어나게 했으며 비천한 나사렛 동네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게 했습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머리를 둘 곳조차 없게 하였고 해가 지도록 설교하여 몹시 피곤한 때에도 병든 자들이 몰려오면 한명씩 일일이 안수하여 고쳐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데려다가 왕을 삼고자 할 때 자리를 피하여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 자들에게로 향하는 것이었고, 주님의 사랑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겸손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슬퍼하던 무지한 군중들을 정죄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우는 것이었으며,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대적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랑과 겸손을 날마다 경험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계신 영광의 신비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이렇게 대하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나와 함께 사랑과 겸손의 길을 가자. 헛된 영광, 육신의 욕심, 미래의 야망 다 버리고 나와 함께 사랑과 겸손의 길을 가자. 초청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기 원합니다.



** 바울의 사랑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사랑을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다함께 고린도전서 8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고린도교회에서는 우상들에게 바친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14장에서도 이러한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여러 교회들에게 이러한 문제의 혼란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우리가 추석 때 친척들이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낸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와 비슷합니다.

4절에 보시면 "그러므로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들을 먹는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줄 아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너무나 명확합니다. 우상은 결국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일반 음식과 아무 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어도 더 낫지 아니하고 먹지 않아도 더 못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으나 안 먹으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지식이 없는 성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의 시장에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고기는 한 번 신전에 제물로 드려졌던 것이었습니다. 우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는 믿음이 좋은 형제들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고기를 사다 먹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음식을 성결케 하여 주시고 이것을 먹고 제 몸이 더욱 건강해서 주님을 더 열심히 섬기게 하여주옵소서." 그러나 우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는 약한 형제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실족합니다. "어떻게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그 고기는 분명 부정한 것이다. 저 형제는 죄를 짓고 있다." 또 어떤 약한 형제들은 "믿음 좋은 형제도 먹으니까 나도 먹어도 되겠지."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거슬러 사람을 따라 행동하므로 믿음이 망가집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주느니라."
올바른 지식을 가진 형제들은 우쭐해서 그렇지 못한 형제들을 무시한 채 고기를 먹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일 자체는 하나님께 죄가 아니었지만 믿음이 약한 형제들에게 어려움을 주었다는 것에서는 죄가 되었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시겠습니다.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말미암아 그 약한 형제가 멸망하리니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느니라.
12 그러나 너희가 이와 같이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느니라.


사도 바울의 행동의 원칙은 어떤 것이 맞냐 틀리냐가 아니었고 사랑으로 걷고 있는가 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해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 기준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형제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나는 세상이 서 있는 한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가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리라."

무엇이 옳습니까? 고기를 먹는 것이 옳습니다. 누가 잘못되었습니까? 고기를 먹지 못하는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세상이 존재하는 한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만약 반드시 고기를 먹으라는 순종의 문제라면 우리는 뒤로 물러설 수 없지만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는 권리와 자유의 문제라면 우리는 충분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만 형제를 위해서 자신의 권리와 정당함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에게 올바른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우리에게는 형제들이 더욱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형제 자매들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우쭐하고 있다면 우리는 2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식만을 가진 고린도 성도들은 우쭐대며 다른 형제들을 개의치 않았지만, 지식과 사랑을 함께 가진 사도 바울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지식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하지만, 사랑을 가진 사람은 자기를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꾸려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육신 안에서 지식에 의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잘못된 것만 고치는 길을 가고 있지 않고 형제를 위해 기꺼이 나의 옳고 그름도 내려놓는 길을 가야 합니다.



** 정리
우리는 오늘 성령의 열매 가운데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자를 번제 헌물로 드렸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사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울은 형제를 위해 자신의 정당함과 권리마저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서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를 옳고 그름으로 대하셨다면 우리는 모두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를 지식으로 대하셨다면 우리는 살아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한없이 부어졌기에 오늘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오래 참아주셨고 지금도 오래 참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하시며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따라올 수 있는 만큼,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한 가지씩 알려주시며 한 걸음씩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빚진 자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보십시오.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받는 지체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요구하고 판단하라고 함께 길을 가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에게 부어진 그 넘치는 사랑으로 더 뜨겁게 사랑하라고 우리를 함께 가게 하셨습니다. 서로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공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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