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세부항목

주의 부드러움(갈 5:16-26)

2008.01.23.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6세)

제목 : 주의 부드러움(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서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주의 부드러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들어가는 말
우리는 아홉 가지 성품으로 표현된 성령의 열매 가운데 벌써 다섯 번째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의 성품은 바로 "부드러움"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성품과는 좀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저는 주로 차갑고 냉정하고 날카로운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오늘 이 주제로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만, 주님의 긍휼을 힘입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기 원합니다.

이 부드러움이란 단어를 영어로 보시면 "gentleness"라고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신사 숙녀 여러분" 할 때 신사가 바로 젠틀맨인데, 여기서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gentle"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신사"라고 할 때는 홀을 꽂아 끼우는 띠를 의미하는 "띠 신"자와, "선비 사"자가 합쳐서 홀을 꽂아 끼우는 띠를 띠는 옷을 입는 상류계층, 즉 교양 있고 잘 배우고 예의를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영어에서 "젠틀맨"이라고 할 때는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제임스 낙스(James Knox)라는 한 성경교사는 부드러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드러움(gentle)"이란 단어의 뜻은 친절(kind)하다는 것이고, 친구처럼(friendly) 대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러움(gentleness)은 또한 온유하고(meek), 온화하며(moderate), 엄하지 않고(not severe), 과격하지 않으며(not violent) 오히려 예의 바르다(courteous)는 뜻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디모데후서에서 경고한 바와 같이 아주 어려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다같이 한번 보시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1 또한 이것을 알지니 마지막 날들에 위험한 때가 이르리라.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탐욕을 부리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신성모독하며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본성의 애정이 없으며 협정을 어기며 거짓 고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자들을 멸시하며
4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5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그것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너는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특별히 우리는 3절 뒷부분에 있는 "사나우며"라는 표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를 사랑하며 교만하며 사나워집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긍휼이 없어지고 마음은 강팍해지고 점점 차가워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땅히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가지고 있지만 능력은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는 사납고 이기적이며 주님의 성품인 부드러움과 친절함을 열매맺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 믿음의 사람들 - 이삭
성경에 나타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들이 매우 부드러운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하나님을 따라 걸어온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정당함과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상처와 손해를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그대로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삭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 세에 얻은 아들로서 자신의 아버지는 너무나 늙고 힘이 없었지만 아버지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부릅니다. "이삭아, 이삭아,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께 번제 헌물을 드리러 가야한다." 이삭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다른 두 청년과 함께 번제 헌물에 쓸 나무를 쪼개어 준비합니다. 이틀의 여정을 지나 셋째 날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두 청년을 남겨두고 이삭에게 번제 헌물에 쓸 나무를 등에 지웁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손에는 불과 칼이 들려있고, 아버지의 표정은 굳은 결심을 한 듯 쉽게 무엇을 묻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삭이 어렵게 질문합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 헌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어요?"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실 것이다." 그리고 산에 도착한 아버지는 이삭과 함께 제단을 쌓아 올립니다. 제단 손질을 마치고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삭의 손과 발을 묶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삭이 이때에 만약 20세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120세의 할아버지입니다. 이삭이 아버지를 뿌리치고자 했다면, 달아나고자 했다면 충분히 그럴 만한 젊음과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정말 어린양같이 아버지가 하는 일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아마도 이삭은 이렇게 고백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내가 번제 헌물이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내 자신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이 모자란 자도 헌물로 받아주신다면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에서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지만, 아버지에게 생명을 바치기까지 순종하는 부드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이후에 아브라함이 죽고 이삭은 새로운 가장으로서 가정을 인도했습니다. 당시에 광야에서 순례자로서 유목생활을 하였던 이삭에게는 우물이 너무 중요했습니다. 이삭은 그랄 골짜기에서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팠지만 갑자기 나타난 그랄의 목자들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그냥 주고 떠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우물을 팠을 때 또 다시 다툼이 일어나자 우물을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우물을 팠을 때 다툼이 일어나지 않자, "이제 주께서 우리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 주셨은즉 그 땅에서 우리가 다산하리라."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이삭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행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싸움을 걸고 우물을 빼앗았던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며 거칠게 나설 때에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따라 부드러움 가운데 걸을 때 주님은 우리의 원수들과도 화목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 믿음의 사람들 - 요셉
이제 요셉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요셉은 10명의 배다른 형을 가진 막내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동생 베냐민을 낳으면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막내였던 요셉을 너무나 사랑했고, 또 이제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장남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요셉의 나이는 17세. 꿈도 많고 미래도 창창한 젊은 요셉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려고 형들을 찾아갔던 요셉은 형들의 습격을 받고 옷이 발가벗겨지며 구덩이 던져졌다가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가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은 충격과 공포로 휩싸였을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상처와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형들의 무섭게 쏘아보는 눈빛과 구덩이에 떨어졌을 때 형들이 웃으며 대화하는 소리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예의 신분이 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노예가 된 요셉은 억울해 하면서 복수를 꿈꾸지 않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신을 노예로 부리는 자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맡겨진 모든 일을 신실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파라오의 호위대장인 보디발의 온 집안을 다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에도 요셉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걸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게 분노하여 거짓으로 요셉에게 누명을 씌웠고, 질투의 영에 사로잡힌 보디발은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억울함으로 가득찼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많이 울었을까요?
이사야 53장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라."라고 말했는데, 요셉 또한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절망하지 않았고 감옥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였습니다. 요셉은 부드러운 사람이었고 사람들에게 친절하며 잘 받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감옥의 죄수들을 관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하루는 빵 굽는 자들의 우두머리와 잔 맡은 자들의 우두머리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사정을 다 들어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그들의 표정이 너무나 슬프기에 물어보았더니, 그들이 각각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몰라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경이 다 완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꿈이나 환상으로 자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있던 당시는 창세기조차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고 요셉의 해석과 같이 빵 굽는 자는 죽임을 당하고 잔 맡은 자는 직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잔 맡은 자는 직위가 회복되면 자신의 억울함을 기억하고 빼내어 달라는 요셉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파라오는 무시무시한 꿈을 꾸게 되고, 잔 맡은 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요셉을 파라오에게 소개하게 됩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여 앞으로 7년 간의 풍년과 7년 간의 흉년이 있을 터이니 지혜로운 자로 하여금 7년의 풍년에 식량을 잘 비축하여야 할 것을 말하였고, 파라오는 요셉을 총독으로 세워 온 이집트를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7년의 풍년이 지나고 7년의 흉년이 임하는 동안, 저 멀리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도 기근으로 인해 식량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제 요셉의 형들은 먹을 것이 풍부하게 비축되어 있는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갑니다. 이제 요셉의 눈앞에는 자신을 노예로 팔아 넘긴 형들이 제 발로 찾아온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그들에게 복수할 만한 큰 권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같이 창세기 45장 7절과 8절을 보시겠습니다.
7 하나님께서 큰 구출로 당신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고 당신들을 위해 후손을 땅에 보존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이제 나를 여기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분께서 나를 파라오에게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그의 온 집의 주가 되게 하셨으며 또 온 이집트 땅의 치리자가 되게 하셨나이다.


또한 창세기 50장으로 가보시겠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고 장례를 다 마치자, 요셉의 형들은 이제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요셉이 자기들을 죽일 것이라 생각하며 불안해합니다. 창세기 50장 15절부터 보시겠습니다.
15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이르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반드시 갚으리라, 하고
16 요셉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말하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은즉 이제 원하건대 네 형들의 범법 곧 그들의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이제 원하건대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범법을 용서하소서, 하매 그들이 그에게 말할 때에 요셉이 울었더라.
18 또한 그의 형들이 가서 요셉의 얼굴 앞에 엎드려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오직 당신들로 말하건대 당신들은 내게 악을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일이 선이 되도록 계획하사 이 날과 같이 많은 사람을 살려 구원하게 하셨나니
21 그러므로 이제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어린것들을 부양하리이다, 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친절히 말하였더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 주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 같은 우리를 위해 친히 모든 슬픔과 고통을 감당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며 친절히 대하십니다. 요셉은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운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까?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장 나에게 어려운 일이 벌어질지라도,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부당하게 대할지라도 우리가 주님의 부드러움을 붙잡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말로다 형용할 수 없는 은혜의 부으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믿음의 사람들 - 다윗
마지막으로 다윗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도 정말 억울한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대언자 사무엘이 와서 이새의 집의 모든 아들을 초청하여 주님께서 기름 부으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자 하였을 때 아예 제껴진 막내아들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우와 아버지 대언자 사무엘이 우리 집을 다 초청했다고요? 아들들 다 오라고 했다구요?", "다윗아 너는 형들하고 아빠 다녀올 동안 가서 양 돌보고 있어라."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다윗은 아마 울면서 초원으로 나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아버지도 형들도 저를 불러주지 않고 저는 무가치한 아들이요 소외당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주님은 여전히 이렇게 못난 저의 목자시지요? 저는 주님이 목자이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어요."하면서 주님께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마음이 가난하고 그래서 더욱 주님을 갈망하는 어린 소년을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아픔이 있고 서운함이 있고 상처가 있다면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가장 선하신 목자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드럽고 친절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십니다.

이러한 아픔 뒤에, 그리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다윗에게는 골리앗을 향한 큰 승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아픔이 있었으니, 바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향한 어떠한 잘못도 악의도 없었지만 너무나 억울하게도 광야에서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잡히기만 하면 당장 죽을 수밖에 없는 긴박한 도망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시편 18편을 보시겠습니다. 18편 맨 처음에 보시면 설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악장에게 준 주의 종 다윗의 시, 주께서 다윗을 그의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건지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들로 주께 아뢰니라. 그가 이르되, 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9절부터 보시겠습니다.

29 내가 주를 힘입어 군대 사이를 달려가며 나의 하나님을 힘입어 담을 뛰어넘었나이다.
30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주의 말씀은 정제되었나니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도다.
31 주 외에 누가 하나님이리요?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리요?
32 이 하나님은 곧 능력으로 내게 띠를 두르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33 그분께서 내 발을 암사슴의 발 같게 하시고 나를 높은 곳들에 세우시며
34 내 손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내 팔이 강철로 된 활도 부수었도다.
35 또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부드러움이 나를 크게 만들었사오며
36 주께서 내 밑의 발 디딜 곳을 넓히사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35절 뒷부분에 보면 주의 부드러움이, 주님의 gentleness가 다윗을 크고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완전한 기회를 두 번이나 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상처 주고 원수처럼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조차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장면을 기억합니다. 사무엘하 16장을 한번 같이 보시겠습니다. 사무엘하 16장 5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에, 보라, 거기서 사울의 집에 속한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나오니 그는 게라의 아들이요, 그의 이름은 시므이더라. 그가 앞으로 나오면서 올 때에 계속해서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니 그때에 온 백성과 모든 용사들은 왕의 오른편과 왼편에 있었더라.
7 시므이가 저주하며 이같이 말하니라. 너 피를 흘리는 자여, 너 벨리알의 사람이여, 가거라, 가거라
8 주께서 사울의 집의 모든 피를 네게로 되돌리셨도다. 그를 대신하여 네가 통치하였으나 주께서 왕국을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리는 자이므로 네 재난 속에 빠졌느니라, 하니라.
9 이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이르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원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매
10 왕이 이르되, 너희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주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셨으니 그가 저주하게 하라. 그런즉 누가 이르기를,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겠느냐? 하고
11 또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보라, 내 속 중심에서 난 내 아들이 내 생명을 찾거늘 이제 이 베냐민 족속은 얼마나 더 그리하랴? 주께서 그에게 명하셨으니 그를 내버려 두고 그가 저주하게 하라.
12 혹시 주께서 내 고통을 보시리니 이 날 그의 저주로 인해 주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하니라.
1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가 그의 맞은편에서 산비탈로 따라가며 그가 갈 때에 그를 저주하고 그를 향해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이 모습은 마치 성문 밖으로 십자가를 지고 나가시는 주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자신을 따라오면서, 사실이 아닌 것들로 모함하고 저주하는 시므이에게 조차 거칠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집에 큰 친절을 베풀었지만, 사울의 자손인 시므이는 다윗을 원수로 여기고 그를 저주하였습니다. 우리도 때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너무나 큰 친절을 베푸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원망하고 대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모든 건방지고 오만한 말과 마음을 부드럽게 품어주셨습니다.

이제 전쟁이 마무리되고 다윗 왕이 다시 성으로 돌아올 때의 일입니다. 다같이 사무엘하 19장을 보시겠습니다. 16절부터 보시면,
16 바후림에 있던 베냐민 족속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들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17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하고 사울의 집의 종 시바도 자기 아들 열다섯 명과 종 스무 명과 함께 요르단을 지나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18 왕의 집안사람들을 건너가게 하며 또 왕이 선하게 여기는 것을 행하게 하려고 나룻배가 건너가니라. 왕이 요르단을 건너려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19 왕께 이르되, 내 주께서는 불법을 내게로 돌리지 마옵소서. 또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왕의 종이 그릇되게 행한 것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20 내가 죄를 지은 줄을 왕의 종이 아나이다. 그러므로, 보소서, 이 날 요셉의 온 집에서 내가 가장 먼저 와서 내려가 내 주 왕을 맞이하나이다, 하였으나
21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응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주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이 일로 인해 그가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하매
22 다윗이 이르되, 너희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이 날 나의 대적이 되려 하느냐? 이 날 이스라엘 안에서 사람을 죽여야 하겠느냐? 내가 이 날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느냐? 하고
23 그런 까닭에 왕이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에게 맹세하니라.


오늘 우리는 시므이를 죽이려 한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와 같은 마음을 가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아비새는 정당하고 올바른 권리를 말하였지만 그것은 결코 주의 부드러움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모욕하고 저주하며 상처 준 시므이에게 복수하고 원수를 갚을 수 있는 모든 권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하고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 마무리
오늘 우리는 부드러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은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잘 대해주고 관대한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상처 주고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조차 친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삭과 요셉과 다윗은 모두 우리 주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조롱을 당하시고, 수염을 뽑히시고, 버림받고, 거부되셨습니다. 아무런 흠도 점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우리를 위하여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가 되셨습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비천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비천하게 되셔서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먼저 우리에게 친절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부드러움과 친절함으로 대하시기 때문이다. 날마다 주님을 반역하고 대적하는 우리를 주님이 변함 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인도하시고, 우리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제멋대로인 우리들에게 여전히 친절하신 주님으로 인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친절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친절하게 대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의 부드러움을 힘입어 오늘 용서하기 원합니다. 주님이 죄 많은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용서하기 원합니다. 주님이 교만한 저에게 친절하신 것처럼, 저도 친절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저에게 관대하신 것처럼, 저도 관대하기 원합니다.
제가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해주시기 원합니다. 주님의 부드러움과 친절하심이 저를 통해 사람들에게 나타나지도록 주님께 저 자신을 온전히 의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공부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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