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세부항목

우리의 신분(갈 5:16-26)

2008.02.20.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26세)

제목 : 우리의 신분(갈 5:16-26)
본문 :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18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서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신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 들어가는 말
우리는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5장에 나와있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벌써 여섯 번째 항목인 "선함"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선함"이라는 단어를 영어로 보면 "Goodness"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쉽게 말하면 좋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성경에서도 이 단어를 "선하다"라는 의미와 "좋다"라는 의미로 모두 번역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무엇인 선한 것인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12장 28절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성경은 원수를 용서하는 것을 가리켜 선하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울 왕은 다윗을 향하여 "나는 너에게 악을 행하였지만 너는 나에게 선으로 갚았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삼상 24:19). 또한 로마서 2장 4절에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관대하심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성령의 열매 가운데 모든 항목이 그랬지만 특히 이 "선함"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없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한 분 외에 선한 분이 없다고 말씀하셨고(마 19:16) 로마서 3장 12절에서도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라고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선하시다
우리가 성경에서 선하다는 표현을 찾을 때마다 대부분의 말씀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같이 시편 34편 8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오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선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좋은 하나님이라는 것은 지식으로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란다.", "아 하나님은 선한 분이구나." 이렇게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선하시다는 것은 우리가 각자가 직접 맛볼 때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오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누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정말 선한 분이라는 것을 맛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명히 알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인생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바로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좋은 것을 빼앗고 나쁜 것을 주실 것이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방법을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고 가장 선한 것을 주실 것이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집과 오해를 풀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고 가장 선한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안돼"라는 말입니다. 아이가 기어다니기 시작하면서 이것저것 만지고 다니는데 만약 아이가 전기 콘센트를 만지려고 한다면 엄마는 얼른 달려가면서 "안돼"하고 소리칠 것입니다. 아이들이 걸음마를 시작하고 바둥바둥 달리기 시작할 때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차도로 달려나가기도 합니다. 그때 부모님은 얼른 아이를 낚아채며 "안돼"하고 소리칠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기도회 전에 제가 사무실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선일이, 선빈이가 들어왔고 제가 컵라면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조수현 자매님께 "엄마 저도 컵라면 먹을래요."라고 말했지만, 자매님은 "안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잠시 뒤에 교회 1층에 있는 짜장면 집에 짜장면을 먹으러 갔습니다. 선빈이는 짜장면보다 컵라면을 더 먹고 싶었지만 엄마를 따라 짜장면을 먹으러 갔습니다. 자매님이 아이들에게 컵라면을 주지 않고 짜장면을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무 쉽습니다. 짜장면이 더 좋은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서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안돼"라고 말하는 이유는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해야할 일은 부모님이 나에게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서 좋은 것을 빼앗고 나쁜 것을 주시고자함이 아니고,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선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고 자꾸만 원하는 것들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지 않다고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컵라면을 "안돼"라고 말씀하시고, "짜장면 먹으러 가자"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의 육신의 욕심을 내려 넣고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날마다 맛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당장 컵라면이 너무 먹고 싶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안돼"라고 말씀하시면, 그것이 가장 좋고 선한 것임을 인정하고 기쁘게 순종해야 합니다.



** 선한 목자 예수님
우리는 또한 성경에서 선하다는 표현이 우리 주 예수님께도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선한 목자인가 하면 바로 양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으실 만큼 선한 목자이십니다.

다같이 요한복음 10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11 나는 선한 목자니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거니와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아노라.
15 아버지께서 나를 알 듯이 내가 아버지를 아노니 나는 양들을 위해 내 생명을 버리노라.


우리는 모두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친히 길을 잃은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멸망당할 죄인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목자들을 보면 혼자서 일하지 않고 많은 경우 양치기 개가 함께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에서는 여러 양떼의 목자들이 하나의 큰 공동 울타리를 두고 양들을 함께 보관했다고 합니다. 아침이 되어 양떼를 몰고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기 위해서 목자들은 울타리로 오게 되고, 문지기는 목자를 알아보고 울타리 문을 열어줍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섞여있는 많은 양떼 가운데 자신의 양들을 불러냅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알고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자신의 양들만을 인도하여 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목자가 앞장을 서고 양들이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양떼의 뒤에는 두 마리의 양치기 개가 따라옵니다. 보통 이 양치기 개들은 양들의 뒤를 따라가면서 양들이 목자를 잘 따라가고 있는지, 잘못된 길로 가지는 않는지를 살피며 목자를 도와줍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도 두 마리의 양치기 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마리 양치기 개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시편 23편 6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평생에 선하심과 긍휼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우리의 평생에 우리 뒤를 따르며 우리가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지켜보고 있는 두 마리의 개는 바로 선하심과 긍휼입니다.

만약 이 개들의 이름이 심판과 공의였다면 우리는 목자를 떠나 다른 길로 가는 즉시 물려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선한 목자이심에 감사합니다. 또한 우리를 따르는 양치기 개가 선하심과 긍휼인 것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선하게 대하시는지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망가뜨리고 무너뜨린 것을 주님은 언제나 선하심과 긍휼하심으로 덮어주시고 회복시키시며 우리를 계속 인도해오고 계십니다. 주님께 감사합니다.




** 우리의 신분
이제 이러한 선한 아버지 하나님과 선한 목자를 가진 우리들이 어떠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인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셨기에 오늘 우리는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 예수님의 생명을 영접한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번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를 받은 피조물들이지만, 우리가 주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었고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는 우리가 그분의 작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함께 에베소서 2장을 보시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0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선한 행위와 구원의 관계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선한 행위는 구원의 근거가 될 수는 없지만, 선한 행위는 구원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를 해서 구원을 받지 않고 오직 믿음과 은혜를 통하여 선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이요, 작품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방향은 믿음과 은혜를 통한 구원, 그리고 구원을 통한 선한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그것은 바른 길이 아닙니다. 믿음과 은혜를 통하여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구원을 받아야만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창조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새롭게 창조된 작품입니다. 선하신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선한 목자의 인도를 받는 우리들은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작품들입니다.

또한 디도서 2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친히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모든 불법으로부터 친히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의 종착점이 아니라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구속을 받고 정결함을 받은 우리는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은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의 백성과 신분이 다릅니다. 오늘날 이 세상 백성들도 바쁘게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 백성들은 모두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기에 바쁘고 열심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에 열심을 내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기 위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눈은 이 땅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영원한 왕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신 이유는 지옥에 떨어질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공부하고, 형제들과 교제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선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하기 위해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놓은 모든 일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금 더 돈을 벌고, 조금 더 공부하고, 조금 더 무엇을 성취하려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으로서 선한 일들에 열심을 내기 위함입니다. 영원히 남게될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일들에 열심을 내기 위하여 우리는 아직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상도 그것의 정욕도 사라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토록 거하느니라"(요일 2:17).



**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다
우리의 신분은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백성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이렇게 변화되었고 우리도 모두 이러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선한 일들에 열심을 내고자 할 때 우리에게 가장 큰 걸림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육신입니다.
다함께 로마서 7장을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7장 18절과 1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8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찾지 못하노라.
19 이는 내가 원하는 선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아니하는 악을 곧 그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


우리의 육신은 모두 죄의 법에 매여있어서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또 우리의 육신은 사망의 법에 매여있어서 선한 일을 하는데는 완전히 무능합니다. 죽은 사람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듯이 사망의 법에 매인 우리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무익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면서도 죄의 법에 매여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데는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리의 비참한 삶에 십자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사망의 법보다 더욱 강력한 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을 주셔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만유 인력의 법칙에 따라 모든 물체는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있지만, 공중의 새들은 자신들의 생명의 법을 따라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만유 인력의 법칙에 매여 항상 땅으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선한 일을 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성령의 법을 주셔서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도록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빌립보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 바로 그것을 확신하노라"(빌 1:6).

우리는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서 마땅히 주님의 일들에 열심을 내야 하지만 그 능력의 원천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 안에 사시는 영광의 소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만이 주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선한 양심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서 선한 일들에 열심을 내기 위하여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작품들입니다. 우리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육신의 욕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주님을 따르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욕심내는 좋은 것들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선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맛보고 알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날마다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위한 독특한 백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선한 것을 더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다같이 디모데전서 1장을 보시겠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8절과 19절입니다.
18 아들 이모데야, 전에 너에 관하여 주어진 대언들에 따라 내가 네게 이 책무를 주노니 곧 너는 그것들을 힘입어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어떤 자들이 그것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선한 두 가지를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선한 싸움과 선한 양심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양심은 예수님의 피로써 정결하게 되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깨끗해 졌습니다(히 9:14). 또한 로마서에 따르면 우리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우리 자신이 어떠한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롬 9:1). 우리가 언제나 담대하게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선한 양심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들이 선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한번 파선된 배는 다시 항해할 수 없습니다. 물론 고치고 보수해서 다시 항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시간이 많이 허비됩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주님의 선하고 기뻐하시는 일들을 넘치게 감당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선한 양심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막아서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실패하여 양심을 거슬러 죄를 지었다면 정직하게 죄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자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우리의 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시킨다면 그것은 선한 양심을 버리는 일입니다. 양심은 지식의 지배 아래 있고 사람마다 가진 지식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한결같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를 주의하며 눈치를 살피지 말고 모두가 각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의 양심대로 걸어야 합니다. 선한 행위를 위해 창조된 우리들은 선한 양심을 굳게 붙드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양심의 문제를 매우 엄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에 관하여 기록하면서 양심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다같이 고린도전서 8장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7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 지식이 있지는 아니하니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각까지도 우상을 의식하며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여기고 먹으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느니라."

우상은 실제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는 일반 고기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러한 지식을 가진 형제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사상에 올랐던 고기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형제들, 즉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 부정하다고 여겼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은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이 형제들은 자신들의 양심에서 먹으면 안될 것 같은 걸림이 있었음에도 다른 형제들이 먹는 것을 보고 따라서 먹었습니다.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먹은 형제들의 양심은 깨끗했지만, 다른 형제들을 따라서 먹은 형제들의 양심은 더러워졌습니다.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먹은 형제들은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문제가 없었지만, 양심을 거슬러 먹은 형제들은 하나님 앞에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고 행하지 말고, 나의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다른 형제가 어떤 일을 한다고 해서 나의 양심이 반대하는 일을 나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양심에 문제가 없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양심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주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양심을 붙들 때에 우리는 사람을 따르지 않고 믿음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 선한 싸움
이제 우리는 선한 싸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지적할 때 우리 안에는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안에서는 항상 육신과 성령이 서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에 대하여 수동적인 자세로 관람객이 되지 말고 용사가 되어 싸워야 합니다.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는 말은 이러한 싸움에서 아무것도 하지말고 손을 놓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그것을 위하여 너 역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고백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무엇과 싸워야 합니까? 육신의 욕심과 정욕과 싸워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앞부분에 보면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5절부터 10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5 또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이득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
6 그러나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득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은즉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니
8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우리가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니라.
9 그러나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느니라.
10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나 잘못하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을 필요 이상으로 가지고자하는 육신의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 이상을 원하게 될 때 우리는 믿음에서 떠나 잘못하고 스스로를 망치게 됩니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붙들고 12절 말씀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이러한 싸움은 내 안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우리는 적극적인 믿음의 의지를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함으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늘에 속한 백성이요, 하나님을 위한 독특한 백성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고 하늘에 속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신분들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 마무리
오늘 우리는 함께 "우리의 신분"이라는 제목으로, 성령의 열매인 선함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의 신분을 뒤바꾼 것은 우리의 선한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이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이 나타났기에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 잃은 우리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신분은 하늘에 속해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독특한 백성이며,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불물을 가리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선한 양심을 굳게 붙들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으며, 우리가 참으로 선을 행하기 원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도리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인 비참한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 안에서 늘 일하시며 동행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이 땅의 것들을 조금 더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땅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것들은 모두 사라져버릴 허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선하신 하나님을 따라 우리의 신분에 걸맞게 하루하루 매순간 주님을 선택하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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